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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작가 또한 알고 있었다. 한국 미스터리의 열악한 환경을, 더군다나 더 열악한 단편집의 상황을 말이다. 그러면서도 과감히 이 단편집을 출간하기로 한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단편이라는 이유로 여러군데 흩어져 나와서 읽지 못했던 작가님의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읽을수 있다는 기쁨, 이런 독자들을 위해 표지마저도 눈에 확띄는 진한 오렌지빛의 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도진기, 현직판사이면선서 '고진'과 '진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한국형 장르소설의 인기를 가늠해내는 작품을 섰던 작가로 유명하다. 이제는 변호사로써 새로운 출발을 했다고 한다. 변호사가 된 작가의 작품은 판사시절의 작품과 또 어떻게 다른 매력을 보여줄지 미리부터 기대해봐도 좋을 듯 하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문예잡지나 미스터리 전문 잡지, 추리소설 걸작선 등 여러군데에서 실렸던 작품들이다. 다른 곳에서 읽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로써는 처음 보는 작품들이므로 더욱 유심히 관심을 가지고 읽어보게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코멘트를 달아놓은 부분이다.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미리 읽어도 하등 지장이 없지만 이야기를 다 읽은후 본다면 그때 당시가 어땠는지를 알 수가 있어서 더욱 끄덕거려질 것이다.
약간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판타지스럽기도 한 [시간의 뫼비우스]나 작가 스스로도 오컬트 취향이 드러났다고 하는 [외딴집에서] 등은 기존의 작가작품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분위기라 새로운 작가의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완전히 새로움을 주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이름을 모른 채로 작품만 읽었다면 이것은 신예 작가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세번째 실린 [선택]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으며 작가로 데뷔하게 되었다는 작가 스스로도 의미가 깊은 작품으로 꼽고 있는 이 작품은 미스터리함을 풍기면서도 주인공의 인간적인 면도 살려주고 있어서 장르소설답지 않게 찡한 기분으로 읽었던 이야기였였다.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날수록 점점 더 뭉클해지는, 실제로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누구나 '엄마'라는 이름으로는 그보다 더 한 것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이야기.
검사였던 호연정이 개업을 하고 변호사로써 사건을 의뢰받는다. 자신의 딸과 손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는데 경찰에서는 자살로 치부해 버리고 보험회사에서는 그 결정을 바탕으로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다. 검사로서 한발 아니 두발 먼저 생각하고 치밀한 계획을 통해서 사건의 개요를 재정립하고 범인들을 뒤통수를 내리갈겼던 첫번째 이야기 [악마의 증명] 이후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캐릭터.
작가는 이 주인공을 계속 쓰고 싶었던 생각도 있었지만 고진과 진구가 유명세를 타는 바람에 아깝게 사장시켰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꽤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도작가님의 다른 이야기 속에서 고진 변호사와 함께 콜라보를 이루어도 좋겠고 또는 상대편에서나 진구와 함께 나와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고보니 작가가 만들어 낸 캐릭터 하나하나가 다 매력있고 개성적이다. 한국적이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몰입도 또한 뛰어나다. 개인적으로는 시니컬하고 어두운 매력의 고진보다는 밝고 활기차고 그러먼서도 한없이 늘어져 보이는 진구 캐릭터를 더 좋아하는 편이다.
작가가 인정한 대로 한국미스터리의 시장은 일본만큼 그리 활기를 띄지는 않는다. 도정제 이후 책을 읽는 사람들은 더욱 줄었고(매스컴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책을 사는 사람들은 올라버린 책값 때문에 살때마다 몇번씩 더 고민을 하고 그나마 일년에 한번 있는 북페스티발에서 이월도서라던가 전성기가 지나버린, 출판사에서도 창고만 차지하는 책들을 할인된 가격으로 사던 것도 금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도서전은 유명무실해졌다) 이 단편집이 그나마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길 바란다.
장르문학을 시작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추천하고 싶은 책이고 길고 복잡한 트릭에 질려버린 사람에게 한번쯤 쉬어갈 타임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며 도진기 작가의 예전 작품이 궁금하다 하는 사람이라면 적극 환영하는 바이다.
기억을 잇다
최근 들어서 가장 많이 울어버렸던 책. 눈물이 쉴새없이 맺히고 또 굴러서 똑똑 떨어지게 만들어 버린 책.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책을 보려고 했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의 주인공 서수철은 치매판정을 받아 버렸다. 나이 들어 생기는 병이라 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병명.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식인 서민수에게 알라지 않는다. 단지 정리를 하고 여행을 떠날 뿐.
치매판정을 받은 아버지와 회사에서 떠밀리다시피 사직을 한 아들. 그 둘은 답답한 현실을 잊고자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행복했던 기억을 좇아서 움직이지만 그 길은 같은 길. 계속 겹칠듯 겹치지 않는 그 둘의 모습은 사랑하는 연인들이 만날듯 만나지 못하는 그런 영화속의 장면을 연상시키게 한다. 한발씩 꼭 엇갈리는 그들을 보면서 아니 영영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 그들의 이 여행이 끝날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그리워하고 생각을 하지만 정작 아들은 자신의 아들을, 자신의 가족을 생각한다. 내리 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더니 그말이 딱 맞는 것일까. 작가는 젊은 나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나도 섬세하게 그려놓았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얼마나 많이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을까.
그가 아직도 아들의 입장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입장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다지도 절절하게 적어 둔 것을 보면 그 또한 누군가의 아비이지 않을까 하는 짐작만 할 뿐이다. 만약 아직 아이가 없다면,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좋은 아비이자 아들의 역할을 감당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또한 든다.
김정현 작가의 [아버지]라는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때가 있다. 이미 우리집에도 두건이나 있는 책. 독자들은 그때 당시에 현실적인 아버지의 상이라면서 이렇게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알아달라면서 자신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책을 구입을 했었을 것이다. 그 기억은 현재의 이 책으로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 단지 아버지이기 때문에, 가장이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했고 표현하지 못했을 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서수철 또한 그랬다. 아들이 어려움을 얘기할때마다 그는 그랬다. '"기다려 봐라" 그러면 아들은 기다렸고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만 연락을 하는 이기적인 아를. 아니 이기적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아들들이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자기 자신을 돌아보라. 자신의 삶에 치여서 아버징지에게 돈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로 찾아가고 얘기를 하고 전화를 하고 연락을 한 적이 언제인가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분명 만들어 낸 소설인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너무나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라서 다시 한번 울컥 하게 된다.
특히 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아들. 오늘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아버지는 큰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약간의 관심을 바라실 뿐이다. 내가 필요한 것만 이야기가 하지 말라. 오늘은 어떻게 지내셨나, 별다른 일은 없냐, 건강은 괜찮냐, 이런 사소한 것들을 물어주라. 해야하는 말이, 하고싶은 말이 속에 있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을 당신들은 헤아려야만 한다. 당신들은 아들이니까. 자식이니까.
기억을 잃어가는 가는 아버지는 기억을 잊고 있다. 기억을 잊은 아버지의 기억은 아들을 통해서 이어질수 있을까. 이어지는 기억들이 그들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소원]을 읽으면서 안타까와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터널]을 읽으면서 답답해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 작가,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잡고 흔들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작가다. 역시 내공이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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